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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홀로 계신 90이 다 되어가는 장모님이 계신다. 10여년전 장인어른이 먼저 떠나신후 처남마져 사고로 보낸후 5년전 장모님께서도 뇌경색이 와서 한동안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아직도 거동은 조금 불편하다.
장모님이 쓰러지기전만 해도 나도 장모님도 서로 조금쯤은 어려웠고 행동이 불편했었다.그러나 장모님이 쓰러지고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자 내 스스로가 장모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의사선생님의 말로는 지속적인 운동만이 불편하게된 거동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방법이라기에 퇴직후 좀 더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내가 한동안 병원에 머무르며 장모님을 쾌차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돌보기로 했다.
그러자면 장모님이 불편해 하지 않게 하는것이고 방법은 아들처럼 가장 편하게 나를 대할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것이 급 선무였다. 의복을 갈아입히는것은 딸들이 와서 했지만 나머지는 퇴원하는 날까지 전적으로 간호를 내가 하기로 한 것이다.
미리 장모님에게 말씀을 드렸다. "어머님 오늘부터는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 되겠고 의사선생님 말씀대로 어머님은 힘들어도 잘 드시고 열심히 운동하는것만이 어머님이 일어설수 있는 방법이고 내가 꼭 다시 걸어 다니실수 있게 하겠다."라고 하자 어머님도 이에 동의하고 그날부터 정말 열심히 억지로라도 먹으라는 음식은 다 먹고 힘들어도 열심히 재활운동을 하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일어서시고 힘도 생기고 차도가 있었다.
어머님이나 나나 말투도 완전히 낮춘 평범한 말로 달라졌고 어머님께 음식을 드시게 하거나 운동을 시킬때는 인정사정없이 냉정히 하시도록 했다. 오죽했으면 옆 침대의 환자 보호자인 장모님 또래의 아주머니가 "아들이냐?"고 묻기에 사위라고 하자 이상하다는듯 "어떻게 사위가 장모한테 그렇게 하느냐?"고 한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해해 달라고 하자 그제서야 수긍을 한다.
한 동안 어머님과 나는 동고 동락하며 병원에서 약을 드시면서 열심히 재활운동에 열중하다보니 보조기기 없이도 일어서고 걸을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완벽히 예전처럼 회복 되기는 불가능한지 조금은 절둑거리셨다. 의사 선생님도 정말 기쁘하시었고 좀 더 열심히 꾸준히만 하신다면 생활하시는데 큰 불편은 없으실것 같다고 힘을 실어 주셨다.
한달을 그렇게 같이 노력하며 지내다 보니 장모님과 나도 엄청 편안한 사이가 되었고 드디어 퇴원하게 되었다. 그후 내가 장모님에게 가면 친 엄마처럼 번쩍 안아주고 어머님도 스스럼없이 반겨주신다. 나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면서 무척이나 고마워 하신다.
하지만 맏 며누리나 맏딸은 멀리 떨어져 있고 가까이에 딸 둘이서 자주 들락거리며 돌보고 있지만 갈때마다 측은하게만 보인다. 우리 부부는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드리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다행히 바로 옆에 경로당이 있어서 그곳에는 또래 친구분들 세분이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시다가 귀가 하시는게 하루 일과다.
내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홀로 계신 장모님이 무슨 낙이 있을까 안스러운 생각에 모셔오려고 했으나 완강히 반대 하신다. 우리 집에 오시면 심심해서 안된다시며 혼자 있는게 편하다고 하신다. 요즘은 복지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장모님 혼자 계시다보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하루 3시간 오셔서 도와준다. 다행히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도 아주 좋은분을 만나 다행이고...
혼자 계시는게 편할리가 있겠나...사위집에 계시는게 부담스럽기도하고 그래도 불편해서이겠지...
내가 나이가 들어가니 이제사 옛 부모님 세대의 노후를 이해할것 같다. 어느 누구도 세월에는 이길 자 없다고 하지 않았든가? 지금 생각 해 보니 아버님께서도 새벽이면 일어나셔서 골목청소 하시고 마당 청소 하시고 아침 식사를 하셨던것이 이해하게되는것이다.
1년에 두어번 가서 한 바뀌 바람 쏘여 드리고 올라오는게 다였는데 그것보다는 자주 찿아 뵙는게 어머님을 위하는 길이라는걸 알 것 만 같다. 물론 옆에 있는 동서들이 잘 모시고들 있지만... 나도 이제 좀 더 자주 찿아 뵙고 몇일동안 같이 생활하다가 오곤 해야겠다고 다짐한다.